영화 속 명화

시대의 변화를 상징한
〈007 스카이폴〉 속 〈전함 테메레르〉

글. 홍보팀

영화 <007 스카이폴>에서 제임스 본드와 젊은 첩보원 Q와의 대화 속에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가 1839년에 완성한 <전함 테메레르(The Fighting Temeraire)>가 등장한다. <전함 테메레르>는 영국 해군의 영광과 쇠락을 상징하는 메타포로서 전성기가 지난 첩보원 제임스 본드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대상이 되었다.



영광의 종말,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는 단순한 풍경화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과거의 영광과 현대의 변화, 그리고 회고적 애수를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다. 1839년 영국 왕립아카데미 전시회에서 발표된 <전함 테메레르>는 현재까지 애국심의 상징으로 영국인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2005년 BBC 라디오4 채널의 투데이 프로그램이 주최한 설문조사에서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거대한 범선인 전함 테메레르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물리치고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98문의 함포로 무장한 전함 테메레르는 당시 가장 큰 군함 중 하나로,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제독으로 평가받고 있는 허레이쇼 넬슨 제독의 기함인 HMS빅토리아호를 위기에서 구하는 공적을 남겼다. 테메레르의 활약은 유럽 변방의 작은 섬나라 영국이 해상 강국으로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인 대영제국을 일구는 초적이 되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그 영광스러운 범선이 증기선의 등장으로 더 이상 전쟁터에서 활약하지 못하고, 해체를 위해 증기선에 의해 강을 따라 끌려가는 장면을 담고 있다. 터너는 작품 속에서 과거와 현재의 대조를 극적으로 표현했다. 웅장하지만 퇴역해야 하는 테메레르의 하얀 선체는 배경의 노을과 어우러져 빛나고, 이를 끌고 가는 검은 증기선은 산업 혁명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시대를 나타낸다. 이는 기술의 발전과 전통의 종말이라는 역사의 흐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007 스카이폴>에서 <전함 테메레르>와 제임스 본드의 운명

영화 <007 스카이폴>은 2012년 007시리즈 발표 50주년을 기념해 개봉한 007 시리즈 23번째 작품이다. 샘 멘데스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제임스 본드 역에는 6대 제임스 본드 대니얼 크레이그가 열연했다. 2012년 10월 26일 영국에서 처음 개봉한 <007 스카이폴>은 전 세계에서 8억 5,0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려 007 시리즈 영화 중에서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으며, 2012년 제5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향편집상과 주제가상을 수상했다.



<007 스카이폴>에서 제임스 본드와 젊은 Q와 본드는 내셔널미술관에 전시된 <전함 테메레르> 앞에서 대화를 나눈다. 이 장면은 작품 자체가 지닌 상징성과 본드라는 캐릭터의 내면적 갈등을 연결 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Q는 위치 추적 장치와 함께 본드에게 전달한 무기는 지문인식 권총 한 자루가 전부였다. 더이상 폭발하는 만년필 같은 무기는 만들지 않는다는 Q의 대사는 시대의 변화 속에 이미 들어선 영국의 입장을 대변한다.
왜 영국 출신 샘 멘테스 감독은 <전함 테메레스> 앞에서 이 장면을 촬영한 것일까? 그는 세대교체의 상징으로 윌리엄 터너의 걸작 <전함 테메레스>를 등장시킴으로써 영국이 사랑하는 첩보원 캐릭터 제임스 본드의 쇠락을 퇴역하는 전함 테메레스의 마지막 모습으로 표현하려 한 것이다.
젊은 첩보원 Q는 <전함 테메레르>를 보며 “이 그림은 항상 울적함을 느끼게 하죠. 한때의 위대한 전함이 해체되기 위해 불명예스럽게 끌려가고 있으니…. 역시 시간은 피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렇죠?”라고 얘기한다. 제임스 본드는 “젊다고 다 창조적이진 않아”라고 답하지만, 그의 말에는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듯 자신감이 없다. Q는 다시 “잠옷 차림에도 차를 마시면서 노트북으로 요원님보다 더 나은 일을 해낼 수 있어요”라며 제임스 본드가 전함 테메레르와 같은 신세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한다. Q의 말에는 눈부신 활약으로 스파이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제임스 본드도 한물간 신세로 전락해 전함 테메레르처럼 현역에서 은퇴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 담겨 있다.
러시아 스파이들에게 총탄과 미사일을 퍼부으면 만사가 해결되던 시대는 지나가고 보이지 않는 위협에 더욱더 위태로워진 영국의 현실을 자신들도 백분 느끼고 있다는 고백이다. 본드 자체도 체력과 정신력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상태다. 심지어 본드걸 세버린을 통해 ‘두려움’에 대해서 알고있냐고 대놓고 직접 묻고는 본드의 입으로 ‘너무 잘 안다’고 스스로 대답한다. 스카이폴은 영국이 직면한 위기의 상징적 표현이다. 정보 유출, 요원 암살, MI6 폭탄 테러, 열차 테러 등에 무방비로 노출된 영국이 과거의 힘과 영화를 추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과거를 기리며, 미래를 준비하다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와 영화 <스카이폴>은 공통적으로 과거의 영광을 인정하면서도, 변화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탐구하고 있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단순히 쇠락의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필연성을 인정하며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전함 테메레르가 해체를 위해 마지막 항해를 하는 것처럼, 본드도 자신이 속했던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는 단순한 역사의 기록물이 아니라, 인간이 시간과 변화 속에서 느끼는 감정의 깊이를 담은 작품이다. 영화 속 제임스 본드와 Q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전함 테메레르를 현대의 맥락에서 새롭게 해석하며, 과거를 기리고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전함 테메레르>가 담고 있는 상징을 이해하고 <007 스카이폴>을 본다면 영화를 한층 더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